아트선재센터, «커넥트 1:스틸 액츠» 전시회 개최

–  8월 27일~11월 20일, 김소라, 이불, 정서영 작가 작품 전시
–  지난 20여 년간 아트선재센터의 여정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의 기획
–  아트선재센터의1998년, 2000년, 2004년 전시를 재조명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논의
–  2015년 말 시작된 건물 리노베이션 일부 마치고 첫 전시회 열어
아트선재센터는 2016년 8월 2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커넥트 1: 스틸 액츠(Connect 1: Still Acts)»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의 역사와 소장작품에 대한 연구인 ‘커넥트’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로 김소라, 이불, 정서영 그리고 뮤지움 그룹 작가들이 참여한다.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아트선재센터 본관에서 개최되는 동 전시회는 1995년 아트선재센터의 옛 터에서 열린 첫 전시 «싹»에서 출발하여 1998년 정식 개관 이후 현재까지 20여 년간 아트선재센터의 여정을 현재화 하려는 시도로 기획된 «커넥트(Connect)»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회다. «커넥트 1: 스틸 액츠»는 세 명의 작가 개인전을 통해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선보였던 활동을 살펴본다. 아트선재센터는 개관 이래 미술관 시설 보수를 위해 두 차례 휴관하였는데, 첫 번째는 2005년부터 2006년 가을까지이고, 두 번째는 2015년 겨울부터 2016년 여름까지이다. 그 첫 번째 ‘정지’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자 기획된 «커넥트 1: 스틸 액츠»는 개인전을 중심으로 작업 커미션을 통해 작가들의 새로운 작업을 소개하고 소장하는 일을 진행해 온 아트선재센터의 활동을 돌아본다.
«커넥트 1: 스틸 액츠»에서는 김소라, 이불, 그리고 정서영, 세 작가의 전시가 아트선재센터 1층부터 3층까지 각층에서 열린다. 아트선재센터 1층에는 2004년 «안타르티카»에서 선보였던 김소라의 <라이브러리> 프로젝트(2004)가 새롭게 구현되며 이에 따른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진행된다. 2층에는 2000년 정서영의 개인전 «전망대»에서 보여졌던 세 개의 작업, <전망대>(1999), <꽃>(1999), <수위실>(2000)이 그대로 놓이는 한편 새로운 작업이 함께 보여진다. 3층에는 1998년 아트선재센터의 첫 번째 개인전 «이불»에서 보여졌던 <사이보그> 시리즈(1998)와 90년대 이후 미술관에서 전시되기 어려웠던 <장엄한 광채>(2016)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설치된다. 그 외에도 80년대 말에 이불 작가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뮤지움’ 그룹의 강홍구, 고낙범, 나카무라 마사토, 샌정(정승), 세스 프랭클린 스나이더 등의 작업을 포함시킴으로써 초기 작업의 컨텍스트를 드러내고 앞으로 있을 ‘뮤지움’ 전시의 예고편을 마련한다.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여성 작가라는 공통점 외에도 각기 그 시대의 동시대성을 고민하고 저마다의 미학적 언어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던 작가들이다. 이들의 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의 주요 작업들을 다시금 살펴보는 본 전시는,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과거의 작업과 전시를 그대로 재현하고 화석화하기 보다는 새로운 읽기와 재맥락화로 현재화하고 또 다른 미래의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한다.
정서영의 <꽃>은 커다란 하얀 스티로폼을 깎아서 만든 조각으로 높이 210 cm, 가로 300 cm, 깊이 250cm의 볼륨감을 지닌 작품이다. 스티로폼은 기존의 정통 조각에선 보통 사용하지 않는 재료이다. 현대 사회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산업이나 공업용 재료인 가벼운 스티로폼이라는 소재 특성과 날카롭게 깎인 단면으로 인해 작품의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는 <꽃>이 만들어진 기원을 도시의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꽃집 간판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거리의 간판들 중 별로 크지 않아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꽃이라는 글자를 간단하게, 꽉 차게 그리고 대부분 붉은색으로 쓴 네모난 종류의 것이다. 그 간판을 보면 누군가가 느닷없이 내 얼굴 정면에 대고 ‘꽃’이라고 명확하게 발음해 놓고는 획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 라고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작가의 글에서 밝혔다. 정서영의 <꽃>은 일반론적인 꽃의 이미지가 아니다. ‘꽃’이라는 제목을 접하지 않는다면 꽃인지 알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정서영의 작품 제목이 불러 일으키는 시각적 연상작용은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세상의 체계에 대해 반문을 던지는 작가의 작업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꽃’이라는 단어는 작가가 직면한 사회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서 흔하게 보이던 꽃이라고 단순하게 명시된 글자를 맞닥뜨리며 느낀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사물을 통해 사회가 끊임없이 구축하는 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드러낸다. 사물을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을 사유하고 조각을 둘러싼 관계 간의 긴장감과 균형감, 그리고 리듬감의 영역을 탐구한다.
사람 키 반만한 높이의 조각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동그란 조명을 위에 얹고 있다. ‘수위실’이란 제목의 조각은 도심의 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던 아파트의 수위실을 연상하면서도 단어의 이미지가 맞나 싶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작품은 단어의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동시에 모방하지 않는 애매한 크기의 미니어처이다. 더욱이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흔한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수위실>의 조악한 합판이나 <꽃>의 스티로폼이나 모두 흔한 산업이나 공업용 재료인데 작가는 기존의 조각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던 이러한 재료를 사용하여 시대성을 반영하고 관습화된 작품의 권위 밖에서 사물에 대한 다른 경험을 유발한다.
<수위실>의 형태도 건설 붐을 타고 급성장한 한국의 도시에서 획일적인 건축 형태로 지어진 무척이나 익숙한 한국적인 구조 건축물의 수위실 모양이다. 특히나 한국의 도시에서 성장한 우리들의 눈에는 매우 당연하고 익숙한 시설물이다. 그 시설물이 전시장에서 건축물의 미니어처 같은 모호한 크기의 조각으로 우리의 눈을 끌고 단지 기능만 충족하는 무척이나 건조한 건축 구조물의 형태로 등장하여 의문을 자아낸다.
작가는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사물의 형태를 제시하되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사물이 처한 상황을 조정한다. 그리고 그 속성을 따라가며 그 당연함의 이면에 존재하는 특수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물은 사회의 기능과 형태 양상에 의문을 던지는 작가의 인식을 담는 사물로 대체된다.
정서영의 <모르는 귀>는 2010년 공연인 <미스터 김과 미스터 리의 모험>에서 출연자의 한쪽 귀로 등장했다. 이 공연에서 모든 출연자는 정체성이 모호한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출연자는 사람이 되어가는 요괴 혹은 요괴가 되어가는 사람으로서 등장했었고 이 귀는 끝이 뾰족한 전형적인 요괴의 귀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난 작업에서 퍼포머가 쓴 귀가 이번 2016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에서 커다란 전시장의 벽에 등장하거나 아니면 한 남자의 한쪽 귀가 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2000년에 보여졌던 <전망대>, <꽃>, <수위실>의 세 작품이 16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보여진다는 문제를 생각하며 이 작업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16년 전의 시간을 다듬고 문맥화하기 보다는 세 작품이 다시 등장한다면 지금 어떤 지점에 이어 놓을 수 있나를 생각하며 <모르는 귀>를 만들었다. 이 요괴의 귀는 아주 간단하면서 암시적인 동시에 명시적인 순간을 제안하기 위해 등장하며 또한 <전망대>, <꽃>, <수위실>이 펼쳐놓은 공간이 다른 시간으로 흘러나갈 구멍의 역할을 한다.
 한 남자의 한쪽 귀로 등장하는 퍼포먼스는 이번 전시 기간 동안 두 차례 진행될 예정이다. 요괴의 귀는 그 전형적인 속성으로 현실공간에 특별한 리듬을 부여한다. 전시장에서 그 귀는 사물로서 벽 위에 나타나 정지된 순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다시 몸이라는 현실에 슬쩍 얹혀 등장한다.
<전망대>는 작가가 친구에게 받은 엽서의 한 면에 인쇄되어 있던 사진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 엽서에는 북유럽 어딘가의 70년대식 수영장 사진이 담겨 있었는데 그 사진의 한쪽 구석에 아주 작은 크기의 전망대의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엽서에서 본 작은 전망대의 형태는 210cm의 높이와 120cm 너비의 조각이 되어 전시장에서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제작 과정에서 전망대의 크기가 실제 어떤 크기로 눈 앞에 재현될 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고도 어려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크기란 이미지로서의 전망대를 눈앞 어디까지 끌어낼지를 결정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이 조각의 독자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조각의 제목은 전망대이지만 전망대의 기능은 전혀 지니지 못하고 있다. 얼핏 보면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전망하는 기능을 보유한 건축 조각물로 보이지만 실은 그리 작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애매한 크기이며 무언가를 높이 보거나 멀리 보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은 충족시키지 못한다. 작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이미지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연상되는 단어와 언어의 본래의 기능과 의미에서 벗어나 일반적이고 익숙한 사고체계에 의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흐트러뜨리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한 사물 형태 안에서 의문을 던지고 탐구를 할 수 있고 그 사물이 놓여진 공간과의 연계 관계에서 긴장감이 유발된다. 작품이 어느 공간의 어느 위치에 놓이냐에 따라 작품이나 전시가 보여지는 바가 달라지고 관객이 무엇을 보는가가 달라진다. 일단 보여지는 모든 것은 다 언어이다. 사물 내부에서 풍기는 언어, 사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언어, 전시장에 위치한 사물과 사물 간의 긴장감이 풍기는 언어, 사물의 형태를 지닌 조각과 관객 간의 상응을 통해 관객은 작가가 고민하고 제시한 언어를 자율적으로 느끼며 새로운 사고의 영역으로 다가간다.
http://artnews.me/?p=37731

https://vimeo.com/183773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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